베드로, 야고보, 유다를 통해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베드로, 야고보, 유다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머 리 말
베드로는 복음을 방해하는 요인과 거짓선지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강한
어조로 말을 전했다. 심지어 범죄한 천사를 지옥에 가두는 이야기와 노아 홍수 사건을 연결시켰다. 그리고 율법주의를 경계하고, 성도들이 그들에 의해 시험당하고 핍박
당할 것을 말하고 인내로 견디도록 권고 했다.
부활생명을 가진 자의 특성에 대해서 말을 한다. 거룩함 왕같은
제사장.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자라고 말을 한다. 베드로가
말하는 성도의 내적으로 외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말하면서, 항상 기억하며 살도록 권고한다. 형제사랑, 사리사욕에 흔들리지 말라, 육체의 정욕제어 하라, 이방인처럼 향동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인내하라는 등의 권고이다
남편과 아내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나타내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영적 죽은 자의 모습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고 난 뒤에 옥에 가서
죽은자들에게 복음 전파하고, 성도는 양의 무리를 치라는 것이다성도의 부활과 심령 속에 세워진 성전에
대한 성경 말씀을 흔드는 자들이 있는데 성경 사사롭게 풀면 안된다고 경고했다.
야고보는 부활생명의 믿음에 대해서 설명했다. 역시 현재적인 부활에 대해서
많은 핍박이 있을 것이지만, 핍박과 시험을 참아라는 것이다. 부활생명을
사는 자는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부활생명을 가졌다고 믿는 자는 율법주의에서 떠나는 조치를 행하라는
것이다.
부활신앙인의 내 외적 품행, 입을 조심하고 정욕제어, 세상의 허탄한 것에 빠지지 말라, 죄를 사해주는 기도 등을 제시한다. 자기가 주인인 자는 율법에 따라 판단하고 차별한다
유다는 거짓선지자를 경고했다. 인본주의 율법주의 영지주의들이 복음을
훼손한다. 거짓선지자들을 악한천사와 소돔 고모라 비유하고, 부활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진 자들에 대해서 경고했다. 육체의 부활을 믿는 자에 대해서, 예수의 시체는 다시 부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라지게 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시체가 사라진 것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모세와 비유와 에녹의 부활 사건을 바유하며 육체의
부활을 주장하는 자에 대한 경고를 했다.
2024.
진리의 선교회
목
차
제1부. 베드로/ 1
Ⅰ. 믿음과 구원
1. 그리스도의 고난/ 1
2. 구원/ 2
3. 믿음/ 3
Ⅱ. 성도의 의미
1. 산돌 같은 신령한 집/ 7
2. 왕 같은 제사장/ 9
3.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자/ 10
Ⅲ. 그리스도인의 삶
1. 거룩한 삶/ 12
2. 청지기의 삶/ 14
3. 하나님의 종/ 15
4. 아내와 남편/ 16
5.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18
6. 양의 무리를 치는 자/ 18
Ⅳ. 거짓선지자와 거짓 교사를 조심하라
1. 범죄한 천사의 이야기/ 20
2. 노아의 홍수이야기/ 21
3.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 23
4. 발람의 이야기/ 25
5. 개와 돼지의 이야기/ 25
Ⅴ.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
1. 하나님의 날/ 27
2. 부활의 모습과 새성전이 세워짐/ 28
제2부. 야고보/ 29
Ⅰ. 성도의 삶
1. 믿음과 지혜/ 29
2. 낮추는 삶/ 30
3. 시험을 견디는 삶/ 33
4. 행하는 삶/ 34
5. 차별하지 않는 삶/ 38
6. 말에 실수가 없는 삶/ 40
7. 세상과 결별하는 삶/ 42
8. 남을 비방하지 않는 삶/ 44
9. 허탄한 색각을 가지지 않는 삶/ 45
10. 부에 대한 경고/ 46
11. 맹세하지 말라/ 48
Ⅱ. 인내와 기도
1. 인내/ 49
2. 기도/ 50
제3부. 유다/ 53
Ⅰ. 거짓교사들에 대한 심판
1. 율법주의자들/ 53
2. 범죄한 천사 이야기/ 54
3.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 55
Ⅱ. 교회 안에서 분열을 야기하는 자들
1.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 56
2.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율법주의로부터 나오게 함/ 60
제1부. 베드로
Ⅰ. 믿음과 구원
1. 그리스도의 고난
베드로전서 2장 22-24절『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죽으신 것이다. 그 순종은 모든 인간의 죄를 속량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을 떠난 존재들이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하는 믿음을 가진 자를 죄에서 건지시겠다는 의미다. 여기에서 믿음은 바로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는 믿음인 것이다. 죄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고, 의에 대해서 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그래서 교회에서 치유사역을 강조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
병을 치유하는 것을 포함하지만, 이면적으로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영적으로 병든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영적으로 회복됨을 말해주고 있다.
2. 구원
베드로전서 1장 8-9절『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상속받는 자가
이렇게 기뻐하는 것이다. 프쉬콘(ψυχῶν)은 혼을 의미한다.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육은
부모로부터 온 것이며, 혼은 영과 육이 합하여 만들어진 옷과 같은 것이다. 성경은 혼을 옛사람으로 표현한다. 옛사람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혼에는 탐욕이라는 죄가 들어있다. 그래서 탐욕이 있는 혼이 영을
죽이는 것이다. 옛사람인 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거할 수 있다.
혼에는 탐욕이라는 죄가 들어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육체가 죽고 혼이
죽었다고 한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서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사르키)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사르키는
육체라고 번역되었지만, 육의 몸(혼)이다. 성도가 육의 몸을 벗고, 영이
영의 몸(부활체)을 입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는 육의 몸은 죽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생명으로
영이 영의 몸을 입고, 살아나는 것이다.
3. 믿음
예수의 제자가 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을 수없이 보면서 이 분이야말로 성경에 예언하신 그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마태복음 16장 13-14절에서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다.“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다. 제자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장 17절, 예수께서는“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칭찬하시고 축복하셨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오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곧바로 물위를 걸었으나 바람을 보자 빠지고 말았다. 이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믿음이 작은 자라고 말했다. 이 믿음은 율법 아래 있는 믿음이다. 율법 아래 있는 믿음은 육체가 반응한다. 그래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마태복음 14장 28-31절『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율법 아래 있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시자, 부활에 대해서는 관심없고, 십자가의 죽음만 귀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마옵소서 라고 강하게 항변했다.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는
비난까지 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어떻게 반석 같은 믿음이 되었을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을 앞두고, 닭이 울기 전에 세번이나 예수를 부인했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의 형장에 끌려갈 때, 도망가버렸다. 그러나
그는 회한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그는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갔던 자였다. 그 사이에,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어떠한 믿음인지 많이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가 힘있는 메시야로 등극할 경우,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예수님이 자신을 수제자로 여기시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하게 생각했는데, 갑자기
예수가 십자가 앞에서 힘없이 죽는 모습에, 그는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부활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찾아가셨다. 벽을 뚫고 갑자기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바라보던 제자들이 유령인줄 알고 놀라서 두려워했지만, 예수님은 부활의 몸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다. 부모로 부터 받은 육체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태어난 영의 몸이라는 사실을 말해주신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동안 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죽었던 영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 방법외에는 없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뒤에 성령이 임하시고, 베드로는 요엘서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사도행전 2장 18-19절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아포
투 프뉴마토스 무)을 모든 육체(사르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사르카는 혼이다. 이
혼(영의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혼이 아니라, 하늘로 부터 받는 부활의 혼(영의 몸)이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서 영이 영의 몸을 입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혼은 두려움을 만들지만, 성령에 의해 하늘로부터
받는 혼은 두려움이 없어진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혼이 작동되어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혼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서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사르키)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사르키는 혼(육의 몸)이다. 육의 몸은 육체가 아니라 육의 몸인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혼의
구원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이전의 혼은 죽고, 살아난
영이 새로운 하늘로부터 오는 혼을 입는다. 이것이 구원인 것이다.
프뉴마토스(πνεύματός)는 성령을 의미한다.『아포 투 프뉴마토스 무 ἀπὸ τοῦ πνεύματός』는 나의 그 영으로부터 부어질 것이다 라는 의미다. 성령을 부어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많은 은사를 부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은사는 예언과
환상 등을 의미한다. 성령세례받은 자들은 이렇게 표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자녀들(어린아이들)은 영적인 자녀를 의미한다. 처음 성령을 받은 자들이 예언을 하는 것이다. 젊은 이들이 환상을
본다는 환상은 비전이다. 신앙 생활이 성숙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하나님 나라 선포에 대한 방향과 목표)이 생기는 것이다. 노인들이 꿈을 꾸는 것은 신앙이 성숙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성령 충만을 받았을 때 이렇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남종과 여종에게도
은사를 부어준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성령 아래 있을
때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담대히 전하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인데, 이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는 불가능함을
말해준다. 사람의 마음으로 결단해서 되는 그런 믿음이 아닌 것이다. 베드로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위험이 있는 곳에서도 대담히 전도를 했다. 그리고
유대지도자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들어갔을 때도, 찬송하며 여유있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결국 천사가 쇠사슬을 풀어주고, 베드로는 감옥을 나오게 된다. 성령이 아니고는 이와 같은 믿음은 결코 나올 수 없다.
Ⅱ. 성도의 의미
1. 산돌 같은 신령한 집
베드로전서 2장 6-8절『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아크로고니아이온)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톤 로곤)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에테데산)
것이라』
아크로고니아이온(ἀκρογωνιαῖον)은 으뜸(최고의) 모퉁이 돌이다. 다윗성이 있던 곳이 시온이다. 일반적으로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하는데, 베드로는 성전되는
성도를 시온에 둔다고 말한 것이다. 다윗의 믿음과 연결시키려고 한 것이다.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있으며,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맛나가 든 항아리가 있었다. 그리고 언약궤 위에는 두 천사 모양의 것(그룹:케르빔)이 있다. 두 천사 가운데는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데, 시은좌(은혜의 보좌)라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그들을 보호하는 존재로 여기는
정도였다. 심지어 엘리 대제사장 시절 언약궤를 전쟁의 방어막으로 사용하다가 적에게 빼앗기는 사건이 발행했는데, 언약궤를 빼앗은 적군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돌려보내려고 하다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일이 발생한다.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언약궤를 소중하게 여긴 자가 바로 다윗이다.
다윗은 언약궤가 돌아올 때 춤을 추고 직접 영접한 한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 언약궤를 모시고, 주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모퉁이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시온에 두었다는 말은 시온성에 두었다는 것이 아니라, 다윗과 같이
말씀을 사모하고 지성소의 은혜의 보좌에 나가기를 원하는 자에게 다가간다는 의미다.
말씀은 톤 로곤(τῷ λόγῳ)이다. 톤
로곤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에테데산(ἐτέθησαν)은 그들도 정해졌다. 그들은 믿지 않는 자들이다. 미리
예정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는 말씀이다. 믿는
자는 모퉁이 머릿돌이 보배로운 말씀(그리스도)이나,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냥 하나의 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의미상으로는 『그 돌이 (믿는 자에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로서 (믿는 자에게)라는 것이 들어있다. 토 로고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오늘날에도 말씀을 성경책에
기록된 말씀으로 여긴다. 그냥 성경 말씀을 읽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마음에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2. 왕 같은 제사장
베드로전서 2장 9절『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게노스)이요 왕(바실레이온)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에드노스 하기온)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라오스 에이스 페리포이에신)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게노스(γένος)는 민족 국가를 의미한다. 바실레이온(βασίλειον)은 왕가(royal)라는 표현이다. 왕가의 제사장은 다윗과 같이 왕과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에드노스(ἔθνος) 하기온(ἔθνος ἅγιον)은 거룩한 나라다. 라오스 에이스 페리포이에신(λαὸς εἰς περιποίησιν)은 그의 소유가 되는 백성이다. 아레타스 (ἀρετὰς)는 아름다운 덕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네가지로 말한다. 택하신 족속, 왕가의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백성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했다. 동물을 죽여
그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므로 제사장이 죄인의 대리자로, 그리고 제사장은 하나님의 죄 용서를 주시는
은혜의 중보자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갔으며, 그 분이 또한 성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중보자로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정체성을 말한 이유는 어두움(사탄:죄의
근원)에서 불러내고, 기이한 빛(하나님의 의)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려고 한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에 빠져,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떠난 죄인임 깨닫고, 장차 오실 그리스도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인
것이다. 그래서 회개하는 자들은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믿으므로, 현재적부활의 몸을 입게 된다. 성령이 인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자
베드로후서 1장 4절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에팡겔미타)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데이아스 코이노노이 퓌세오스)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에팡켈미타(ἐπαγγέλματα) 는 약속인데, 하나님 나라를 상속으로 주시려는 약속이다.
『데이아스(신) 코이노노이(참여하다) 퓌세오스(본성) θείας κοινωνοὶ φύσεως 』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본성(신성)에 참여하는 것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신의 성품은 마치 인격적 의미를 나타내지만, 신성은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성도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성품은 변하는 모습이지만, 신성은 절대 변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래서 교회 목사들 중에는 신의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연결해서 말하는 이들도 있다. 신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데, 그들은 신의 성품(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1장 5-7절『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스푸데)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스푸데(σπουδὴν)는 열망으로서, 신성에 참여하는 열망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여덟가지 덕목이 등장하는데, 마치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되어 있으나, 믿음 안에 덕이 있고, 덕 안에 지식이 있고, 지식 안에 절제가 있으며, 절제 안에 인내가 있고, 인내 안에 경건이 있고, 경건 안에 형제 우애가 있으며, 형제 우애 안에 사랑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말 번역에서,『더하라』는 말이 『노력하라:make every effort to add』는
말로 영어성경(niv)에는 번역되었다. 물론 킹제임스 번역은
『주어진다(giving)』로 되어있으며, 헬라어 원문에는παρεισενέγκαντες(파레이세넨칸테스:적용하다) ἐπιχορηγήσατε(에피코레게사테:주다)』(여덟가지 덕목이) 주어지고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신성이 이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믿음을 통해서 덕(탁월함)이 생겨나고, 지식(하나님과의
하나되는 관계)을 통하여 은사를 받게되고, 그래서 사람이
교만해질 수 있다. 그것을 깨닫는 자는 절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내(휘포모네)로 연결된다.
휘포모네는 주님의 보좌에 머무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유세베이안:하나님사랑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형제사랑과 아가페 사랑이 이루어진다.
Ⅲ. 그리스도인의 삶
1. 거룩한 삶
베드로전서 1장 16절에서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하나님이
거룩한데, 어떻게 인간이 거룩해질 수 있는가? 반문할지 모르나, 거룩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를 불
태우는 것이다. 거룩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것이다.
부활이 거룩인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거룩하게 인정해 주신다. 그래서 거룩한 자는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요,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거룩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거룩이신데, «거룩하다» 라는 표현을 한다. 이는 하나님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그 자체가 거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모두 거룩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룩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하나님은 거룩
그 자체인 것이다. 헬라어 성경(두 종류)은
스테파누스와 넷슬 알란드 성경이 있다.
(스테파누스 헬라어 성경)
διοτι γεγραπται
αγιοι γενεσθε οτι εγω αγιος ειμι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이니 너희들은 거룩으로 태어날지니라
(넷슬 알란드 헬라어 성경)
διότι γέγραπται · ἅγιοι ἔσεσθε, ὅτι ἐγὼ
ἅγιος.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이 될지니라 하셨느니라
ειμι 라는 동사는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며, 문법적으로는 현재시제, 1인칭, 단수에
해당한다. εγω αγιος ειμι는 『나는 거룩이다』 라는 의미다. 그런데, εγω αγιος 라고 했을 때 be동사가 없으므로, αγιος가 명사를 수식할 때는 『거룩한 나』 라는 의미가 된다. "나는 거룩이다" 라는 문장과 "나는 거룩하다" 라는 문장은 의미가 다르다. 나는 거룩이다 라는 문장은 나와 거룩은 동일시되지만, "나는 거룩하다" 라는 한글 문장은 나의
상태를 표현해주는 것이다. 즉 거룩하다는 말은 보어로서 형용사적인 용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헬라어 εγω αγιος ειμι에서 αγιος는 보어가 아니라 주어와 동격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ειμι (be동사)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거룩하다라는 보어적 형용사적인 번역이 아니라, 명사적으로 "나는 거룩이다" 라고 해야만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거룩 자체라는 것이다. αγιος가 서술적으로 표현될 때는 αγιος εγω로 되어 나는 거룩하다 라고 될 수 있다. ειμι가 없을 경우에는 거룩의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가 되는 것이다.
ἔσεσθε(2인칭 복수로서 영어의 are에
해당)는 ~이다 라는 의미이고, γενεσθε는 γίγνομαι(태어나다, 생산되다 라는 의미)의 2인칭 수동태로서 거룩으로 태어나라는 것이다. 스테파누스의 성경에 따르면 나는 거룩이니, 너희들은
거룩으로 태어나라(거듭나라)는 의미다.
거룩은 하나님의 거룩이고,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는 자들은 거룩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위로부터
태어나는 자가 거룩이며, 이는 부활생명을 가진 자가 거룩인 것이다. 부활에
대해서, 부모로부터 육을 주장하는 자들은 거룩이 아닌 것이다.
2. 청지기 삶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카리스마)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은사(카리스마χάρισμα)는 여러가지가 있다. 고린도전서 12장 8-11절에서도 은사를 아홉가지로 나열하고 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행함, 예언, 영 분별, 각종 방언, 방언
통역 등이다. 이 은사를 받은 자는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이다.
은사를 받은 자가 자기 생각과 자기의 의지로 은사를 받은 것을 행하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라는 말이다.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은사의 주인이 아니요 청지기다. 따라서 은사는
개인적인 자랑거리가 될 수 없고 우열을 따질 문제도 아니다. 무엇보다 은사는 서로 봉사하고 섬기기 위해
주신 것이다.
3. 하나님의 종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악이란 세상에서 악한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뜻을 가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한 뜻은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이다. 따라서 세상으로부터 자유함을 입었으니,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방관자처럼 행동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실행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돌아오게 하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게 하는 자인 것이다.
오늘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올바로
가르치지 못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악한 자가 된다. 예수를
믿어서 그는 자유함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왜곡된 말씀을 전하므로 악한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대속의 의미를 갖지만, 죄인 역시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되어 죽는 것이다. 이게
죄로부터 자유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날마다 죄를
용서받아야 하고 예수의 피를 계속 필요로 하는 자는 왜곡된 자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부활하셨는데, 성도 역시 그와 함께 현재적으로 부활하여 새셍명을 얻은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고, 장차 육체가 죽은 이후에 부활을 믿는다면, 이는
왜곡된 것이다.
4. 아내와 남편
베드로전서 3장 1절『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아나스트로패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케르데데손타이) 하려 함이니』
여기에서 말하는 남편과 아내는 모두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다. 아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지만, 남편은 하나님을 믿지만, 호 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지
못한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을 돕는 베필이다. 돕는
의미는 원래 하나였는데, 둘로 나누어졌으므로 둘이 하나로 돌아가는 의미를 갖는다. 돌아가는 것은 아내가 남편에게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자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내(하나님을 떠난 자)가 남편(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을 순종하는 것이다.
아내의 행실, 즉 아나스로로패스는 남편(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삶이다. 그래서 아내는 이와 같은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자(남편)에게 설명을 해주고, 자기
남편도 하나님을 떠난 자였는데,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므로 성령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라는 것이다. 아마 이전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아내가
거듭난 후에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깨닫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남편에게 아내가 순종하므로, 남편도 그 이치를 깨닫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케르데데손타이(κερδηθήσονται)는 그들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라는 의미다.
남편은 아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과
아나스트로펜(ἀναστροφὴν) 의 모습을 본다. 아나스트로펜은 부활생명으로 거듭난 자의 모습이다. 육의 몸이 죽고, 영의 몸으로 다시 하늘로부터 태어난 자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의 변화된 모습이다. 아내(하나님을 떠난 자)가 영으로서 자기 자리를
지킬 때(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이 그를 값지게
보시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3장 7절『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그노신)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그노신(γνῶσιν)은 체험으로 알게되는 것(히브리어 야다와 같다) 남편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살아가는 것처럼 아내를 대하라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처럼 생명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께 기도가 되는 것이다.
5.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베드로전서 4장 13절『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파데마신)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파데마신(παθήμασιν)은 십자가의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열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십자가와의 연합을 의미한다. 성도가 직접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연합되어 죽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성도 역시 부활된 것을 믿기 때문이다.
신도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희생정신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으로 오해하는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열매맺는 일이다. 참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는 죽음,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되는 현재적 부활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이때 많은 핍박과
어려움이 다가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도가 “날마다 예수의 피로 죄를 용서받으려 하는 것은 예수를 두번 죽이는 행위다” 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당장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현재적 부활을 외칠 때, 이단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리로 배웠기 때문이다.
6. 양의 무리를 치는 자
베드로전서 5장 2-4절『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아난카스토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카타 데온)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아난카스토스(ἀναγκαστῶς)는 강제로 라는 의미다. 카타 데온(κατὰ Θεόν)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번역되었는데,『하나님 아래서』라는 의미다. 아이스크로케르도스(αἰσχροκερδῶς)는『더러운 이를 탐하여』라는 말이다. 더러운 이는 거짓선지자를 의미한다. 즉 탐욕을 가지고 라는 말이다. 그래서 강제로 말씀을 먹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기고, 또 탐욕적인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양 무리인 성도들을 사랑하며 즐거이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제대로 가르치라는 말이다.
그리고
충성스럽게 섬긴 장로들은 목자장이신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그의 영광에 동참할 것이며, 시들지 않을
왕관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 칭한다.
사사시대를 지나, 엘리와 사무엘 시대는 하나님이 직접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제사장이 왕의 대행자로서 제사장이었던 것이다. 왕이 있으면 백성이
있어야 한다. 백성은 다름 아닌 교회 안에서 부활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성소의 마당만 밟는 자들이다. 부활생명으로 거듭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제사장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죄의 문제에 대해서도 예수님이 마태복음 18장 18절에서 말씀하신다.『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성도가 교회 안에서
부활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에게 죄의 문제를 바르게 설명하고 그 신도가 받아드리면, 하늘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죄의 문제가 풀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한 신도들은 죄를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죄를 지을 때마다 고백하고, 예수의
피로 용서받아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이 원죄이며, 그 결과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6장 3-4절에서 죄에 대해서 죽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박힐 때 하나님이 모든 죄 가운데서 벗어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이것을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말을 전하고, 신도가 그 말을
받아드릴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말을 통해서 그 신도에게 죄를 사해주는 권세를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죄에 대해서 하는 말은 그리스도가 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Ⅳ. 거짓선지자와 거짓교사를 조심하라
1. 범죄한 천사의 이야기
베드로후서 2장 4절『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에페이사토) 지옥에 던져(타르타로사스)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에페이사토(ἐφείσατο)는 아끼지 않다 라는 의미다. 타르타로사스(ταρταρώσας)는 옥에 던진 후에 라는
의미다. 범죄한 천사들에 대해서는 유다서 1장 6절에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천사와 같은 개념이다. 이들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자들로서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이다. 그 마음에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바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사건과 같은 이야기다.
갑자기 영지주의 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악한 천사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 마치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다는 것과 연결시킨다. 영지주의 자들은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자들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범죄한 천사들도 사탄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없이도
스스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의라는 것이다. 자기의 의는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우상을
세워 신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영지주의자들을 악한 천사들과 같이 심판하시겠다고 했다.
2. 노아의 홍수 이야기
베드로후서 2장 5절『옛(아르카이우)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아르카이우(ἀρχαίου)는 아르케에서 나온 말로 우두머리를 의미한다. 즉 우두머리된
세상을 용서하지 않았는 말이다. 옥도온(ὄγδοον)은 여덟번째 라는 의미다. 노아시대에 사람들은 하나님 약속(여인의 후손)을 저버리고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살았다. 하나님보다 자기들의 생각이
중요했고, 하나님처럼 높아지기를 원한 것이다.
마치 바벨탑을 지은 니므롯처럼 하나님을 무시한 것이다. 하나님이 경건하지 못한 자(하나님의 언약을 기다리지 않은 자)에게 홍수를 내리셨다. 홍수는 물세례를 의미한다. 물세례는 물에서 죽은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에 들어가므로 새생명으로 창조된 것이다. 방주에서 나오는 것은 새창조(부활:거듭남)를 의미한다. 방주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이 이야기를 끄낸 것은 세례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가르치는데, 유대인들은 죄를 씻는 것으로 받아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교회에 들어와 잘못된 말을 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죄가 마치 노아의 홍수와 같은 큰 죄라는 것을
말해준다. 세례는 물세례와 불세례가 있는데, 물세례는 노아의
홍수와 같은 죽어야 할 죄인을 상징한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 물세례에 대한 의미를 정확히 설명해준다. 물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씻는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으로 나가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세례는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생명으로
나가는 것이다.
3.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
베드로후서 2장 6절『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개역개정)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도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자들에 대해서 심판을 하시는 것이다. 심판의 기준은 피조물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전에 천사들을 보내셨으며,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듣지 않았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며,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자기의 의를 세우기를 원했다.
2장 7-8절에서『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아셀게이아)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아셀게이아(ἀσελγείᾳ)는 방탕이다. 카타포누메논(καταπονούμενον)은 압박을 당하는 의미다. 에바사니젠(ἐβασάνιζεν)은 괴로움을 당하다는 의미다. 롯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지키고 있었으며, 천사들이 롯과 그의
가족을 소돔성으로 부터 나오게 했으나, 그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소돔 사람과 같이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고 하는 자의 모습이다. 롯의 부인은 오늘날 부르심을 받고 교회를 왔지만, 그리스도가 주인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가 주인인 자를 의미한다.
베드로가 소돔과 고모라를 등장시킨 이유는 세례와 관련이 있다. 불세례는 혼에 대한 죽음이고, 마치 소돔과 고모라에서 심판받아 죽은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세례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들은 율법주의가 바탕이 되고, 복음을 믿지만
여전히 율법도 따라야 한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잘못된 교리를 전하는 자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2장 10절에서『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육체를 따라 간다는 것은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믿는 종교심이 강한 자들이다. 그들은 지식으로 성경을 잘 알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그런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행실을
보면 더러운 양심으로 정욕 가운데서 행한다고 말한다. 퀴리오테토스(κυριότητος)는 주님(예수 그리스도)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님의 다스림을 멸시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주인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 것이다. 말로만 주님이라고 하지만 자기 생각대로 사는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당돌하고, 자부심이 강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며, 하나님의 영광(돜사스 δόξας)에 대해서 신성모독(블라스페문테스 βλασφημοῦντες)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4. 발람의 이야기
베드로후서 3장 15-16절『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에플라네데산)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에플라네데산(ἐπλανήθησαν)은 그들이 미혹되었다는 의미다 거짓교사를
발람으로 비유한다. 발람은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신뢰를 받는 선지자가 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데, 그는 돈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 불법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거짓교사들은
발람처럼 거짓을 전한다. 복음을 믿으면서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부활에 대해서도 잘못된 말을 전했다. 그래서 육체로 부활함을 전하는 것이다.
5. 개와 돼지의 이야기
베드로후서 2장 22절『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개와 돼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개는 이방인을 의미한다. 개라고 표현할 때, 개의 습성을 나타낸다. 잠언 26장 11절에서『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이
말은 율법에서 자유함을 주었는데, 다시 율법에 얽매겨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는데,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3장 2절에서『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몸을 상해하는 일은 율법에
따라 육체에 할례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개와 행악 자와 육체에 할례를 받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율법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을 말한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에서 거룩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자들은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율법을 지켜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에게는 이런 복음을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진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팔아서, 값을 주고 사는 교회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율법으로부터 벗어났지만, 여전히 율법을 따르려고 하며, 죄 가운데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을
개와 돼지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가 사해졌지만, 율법에
근거해서 다시 죄를 짓는지 않짓는지 판단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개, 돼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개와 돼지들이 교회를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율법을 신봉하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발로 밟고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율법주의자들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회유하여 다시 유대교로 돌이키도록 한 것이다. 그들이 핍박과 회유를 해서 성도들을 괴롭혔다.
Ⅴ.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
1. 하나님의 날
베드로후서 3장 10절『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후 우리노이)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파렐류손타이)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휴레데세타이)』
주의 날은 마지막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마음 속에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주께서 성도의 마음 속에
들어오는 날이 어떤 사람은 빨리 어떤 사람은 늦게 찾아오신다. 왜냐하면,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여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하루길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40년을 방황하다가 여호수아 갈렙, 19세 이하의
아이들,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을 제외하고 다 죽었다. 결국
여호수아 갈렙도 불순종 백성들로 인해서 40년이 지나서야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순종의 여부에 따라 갑자기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즉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리 오랜 세월동안 교회를 다녀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신자. 즉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지 못한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생명으로 거듭난 자에게 들어오는 순간, 새창조가 일어난다. 후 우라노이(οἱ οὐρανοὶ)는 마음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파렐류손타이(παρελεύσονται)는 파라(옆에서) 류손타이(오다)의 합성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임재하는 것이다.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간다고
번역했는데, 아마도 주님의 재림을 염두에 두고 번역한 것으로 보여진다.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는 것은 육적 몸(옛사람)이
죽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스토이케이아(στοιχεῖα)는 원소(물질)라는
의미다. 휴레데세타이(εὑρεθήσεται)는 드러나다 라는 의미다.
2. 부활의 모습과 새성전
베드로후서 3장 8-9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가 전하는 부활의 모습은 천년왕국을 말하는 듯하다. 천년왕국은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천국)이다. 천년왕국이라는 말은 천년의 기간이라기 보다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임한다는 의미다. 천년은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돠는 자가 바로 천년왕국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새예루살렘이며, 새하늘과 새땅이다.
성도가 천년왕국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고 죽어야 한다. 물세례와 불세례이다.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 연합되는 것이다. 피와 연합되고 죽은 살에 연합된다. 피는 뿌려지고, 살은 제단에서 태워진다. 베드로후서 3장 6-7절『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물세례와 불세례를 표현하고있다.
제2부. 야고보
Ⅰ. 성도의 삶
1. 믿음과 지혜
야고보서 1장 5-8절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아이테오)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디아크리노메노스)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
지혜라고 번역된 소피아스는 1장 4절에서 미혹당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에 대한 해결방안에 대한 것이다. 아이테이토의 기본형은 아이테오로서 여쭙다(ask) 라는 의미다.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여쭈어봐라는 것이다.
아이테이토(αἰτείτω)는 여쭈어보다 라는 의미다. 에로타오는 친구간에 물어보는 것이지만, 믿음으로 물어보는 것과는
다르다. 전지전능하신 권능자에게 믿음으로 불어보는 것은 확실한 답이 있기 때문이다. 디아크리노메노스(διακρινόμενος)는 디아(~을 통하여)와 크리노(판단하다)의
합성어다. 주의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 속으로 들어가서
판단하지 말하는 것이다. 만일 판단하게 되면 바다 물결처럼 요동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믿음은 완전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신 사례들이 많은데, 병을 고친 후에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고 말씀하셨다. 믿음없는 사람은 두 마음을 품는 자라고 했다. 하나님 말씀을 믿기도 하지만, 자기의 생각을 섞는 자들이다. 안드로포스는 영어로 human으로서 일반적인 사람을 의미한다. 아네르는 남자라는 의미로 사역자를 의미한다. 사역자가 자기 생각을
섞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2. 낮추는 삶
야고보서 4장 10절『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야고보는 일곱가지의 낮추는 자세에
대해서 말을 했다.
첫째는 하나님께 복종하라고 했다.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은 대부분 유대인 기독교인들이었다. 여전히 그들은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자들이었다. 하나님께 복종하라는 말은 십계명을 지켜라 라는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십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들어와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살아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탐욕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기를 낮추고 부인하는 삶이 바로 새계명인 것이다.
둘째, 마귀를 대적하라는 것이다. 마귀가 도망가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탐욕이 죽으면, 결국
마귀도 그를 구속할 수 없다. 신도들이 마귀야 물러가라 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외쳐야만 하는 것이다.
셋째는 성부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성도는 직접 성부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성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매 순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이 때 성령은 보혜사이시다. 기도로서 간구하여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 기도가 세상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성령
충만을 위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넷째가 죄인들에게 손을 깨끗이 하라는
것이다. 죄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교역자는 자신이 죄의
상태로 들어가는지, 매일 손을 씻듯이 바라보라는 것이다. 죄를
씻으라는 것이 아니라, 죄의 원인이 되는 상황에 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다섯째가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성결하라고 한다. 두 마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세상도 좋아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은 영적으로 간음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성결(거룩)하라는
것이다. 성도가 거룩해지는 방법은 자기를 하나님께 태워서 영적 산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죽는 것 만이 성결해지는 길이다. 두
마음의 탐욕에 대해서 죽으라는 것이다.
여섯째,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 4절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다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던 것을 깨닫고 애통하라는 것이다. 물질의 쾌락으로 인한 웃음이
애통으로 바뀌게 되고, 물질의 풍요로 인해서 즐거움이 오히려 근심이 되는 것이다.
일곱째가 주 앞에서 낮추라는 것이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은 영이 가난한 자들이다. 자신이 하나님께 대하여
지은 죄를 깨닫고, 영이 가난하게 된 것을 고백하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죄를 깨닫는 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다. 율법이 알려주시는 것은『너희들의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심령은 영을 의미한다.
3. 시험을 견디는 삶
야고보서 1장 2-4절『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페이라스모이스)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도키마조)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헤
데 휘포모네)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페이라스모이스(πειρασμοῖς)는 시험을 의미한다. 마귀는 택한 자까지도 시험하게 만들려고 하며, 이 땅에서 예수님까지도 시험했다. 성도가 마귀의 시험에 들어가면, 성도는 믿음의 시도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머물게 되므로 오히려 기쁘게 여기라는 것이다. 휘포모네는 오늘날 『관상(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기도』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 보좌에 나아가 머무는 것(헤 데 휘포모네)은 온전한 사역을 갖게 한다는 의미다. (에르곤 ἔργον: 사역, 텔레이온 τέλειον:온전한, 에케토 ἐχέτω:갖게한다) 온전히
이루라 로 번역된 것에는 사역이라는 말이 빠져 있다. 하나님의 사역을 맡은 자들이 사탄의 시험에 들어가면
온전한 사역을 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 보좌에 나아가 머물게 되면,
시험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사역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4. 행하는 삶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거울에 드러난 자기의 얼굴은 참 얼굴이 아니라, 그림자이다. 그래서 그림자는 율법이요, 참 형상은 그리스도이시다. 골로새서 2장 16-17절에서『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초대교회 당시에 율법과 복음에 대한 논쟁이 많았음을 알게한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그림자이나, 복음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오셨는데도, 율법을 지키고 있음은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아파트를 사기 위해 사전에 모델하우스에 가서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아파트를 계약하고 입주를 기다린다. 그리고 아파트가 완성되어 집주인이 계약한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전에 갔던 모델 하우스에 가서 이곳에서 지내겠다는 모양이다.
모델하우스는 그림자요, 진짜는 입주할 아파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받아드리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으면, 율법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계속 율법에 머물고 있으면, 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도행전 15장 12-41절에서, 당시에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할례로 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안디옥 교회는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친 사람들이 등장함으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구원 교리에 관한 신학적인 논쟁을 안디옥 교회는 자체적으로 결정지을 수 없었기에 바울과 바나바와
대표 몇 사람을 예루살렘 교회로 파송했다. 안디옥 교회에서 발생한 구원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불붙게 되었다.
베드로가 할례와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이방인들로 구성된 백부장 고넬료 집안사람들과 유대인들로
구성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구원받은 것이었다(7-9). 둘째는 과거 유대인 조상들과
현재 예루살렘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동일한 방식으로 구원받은 것이었다(10-11).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원하는 방식이 시대에 상관없이 동일함을 강조했다.
야고보는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은(14) 단순히 베드로의 경험이 아니라 성경 말씀(아모스
9장 11-12절)을
성취한 것으로 보았다. 베드로의 사역은 선지자들의 말씀과 일치하는 사역이었다. 야고보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구원은 할례나 율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아모스서를 근거로 주장한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와 베드로와 야고보의 주장은 같았다.
베드로와 바울과 야고보의 최종 증언을 들은 후 예루살렘 교회는
최종 결정을 내렸고, 결정된 내용을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알리기로 했다. 예루살렘 교회는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친 사람은 예루살렘 교회와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예루살렘 교회는 공식 입장을 안디옥 교회에 알리기 위해서 예루살렘 교회 성도였던 유다와 실라를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냈다(22,27).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에서 불거진 구원에 대한 진리 외에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는 내용을 덧붙였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대다수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과거 우상을 섬길 때의 삶의 방식이 아직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고보는 모세의
율법에 근거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우상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완전히 끊어 버리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바랬던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과 안디옥
교회의 사도들과 대표들이 모여서 구원의 문제를 논의한 최초의 회의였고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로 보낸 편지는 교회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공식문서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회의와 공식문서를 통해서 할례와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친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한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가 말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은 율법을 떠나지 않고 율법을 지켜 행하는 신자들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행함이란 율법에서 벗어나라는 말이다. 오늘날도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인 것이다. 날마다 제사를
드리는 것같이 예수의 피로 죄 용서를 받아야만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 안식일(주일 성수), 안식년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거나, 절기를 지키는 행위, 십일조를 철저히 행해야 한다는 것이라든가,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해서 거룩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자들, 사역자를
제사장 그룹으로 생각하는 자들, 계명을 문자 그대로 철저히 지켜야 한다거나 하는 등의 율법 속에 갇혀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예수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율법에서
벗어나는 행위가 없는 것이다. 즉 율법에 대해서 죽지 않은 사람들이다.
율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결국 율법에 대해서 죽어야 할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약시대 죄인은 희생제물을 가지고 성소마당으로
들어오면, 제물을 죽여서 죄를 전가하고, 그 피를 제단에
뿌려 죄사함을 받았다. 이 때 희생양만 죽은 것이 아니라, 죄인도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이다. 그런데, 죄인은 희생양이 죽었으므로,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사람들을 대속하여 죽었으므로 그것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원리에서, 마찬가지로 그 믿는 사람도 예수와 함께 죽었음을 믿어야 한다. 로마서 6장 3-5절『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따라서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율법에서 벗어나는 행함이요, 예수와 함께 죽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5. 차별하지 않는 삶
야고보서 2장 1절『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텐 피스틴 투 퀴리우)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프로소플램사이아스) 대하지 말라』
텐 피스틴 투 퀴리우(τὴν πίστιν τοῦ κυρίου)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믿음이다.
프로소플램사이아스(προσωπολημψίαις)는 프로(앞에)소플램프시아이스(눈에 보이는 것)는 눈 앞에 보이는 것들 안에서 라는 말이다. 즉 눈앞에서 보이는 것들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결국 자기가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되라는 것이다. 자기가 믿는 믿음은 육적 생각(혼)의
믿음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예수의 믿음은 영의 믿음이 되는 것이다. 자기가
믿는 믿음은 결국 인본주의 신앙으로 흐르고, 기복신앙에 빠진다.
기복주의 신앙에 빠진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신도들에게도 돈으로 차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었던 영을 살리는데는 관심없고, 헌금을 많이 내게 해서 교회를 크게 키우고, 자기의 영광을 내세우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은 세상의 복이
아니라, 영에 대해서 갈망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택해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하신다. 반면에 세상에서 부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난한
자들이다. 부자청년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부자청년에게 세상에 대해서 가난해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돈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이면적으로는 기복적인 교회의 지도자(교역자)들은 영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갈망하는 자들을 비웃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교회 신도들도 그들을 함께 조롱한다. 신도들을 법정으로 끌고 간다는 것은 교리적 지식으로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다. 예수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데,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율법의 계명을 열심히 지켜나가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고, 이웃사항이므로, 우리는 열심히 율법에 정해진 계명을 잘 지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주의 유대인들이 한 것처럼 교회 안에서 인본주의에 물든 자들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이름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다.
성도는 가치있는 일을 해야한다고 가르친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죽었던 영을 살리는 일이다. 영의 마음으로
하면 가치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영에는 관심없고, 육의 눈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육적 마음(혼의 마음)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다.
영과 하나님 나라는 관심없고, 세상에서 잘되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을 하면서, 하나님을 잘
믿으면, 세상에서도 잘된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이다. 최고의
법은 성령의 법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육의 눈으로 믿는 자들이며, 율법주의자들이다.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려고 하다가 그것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동물을 죽이는 희생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을 기억하게 하셨으나 대부분 율법 속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거듭난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들이다. 그래서
율법 위의 성령의 법으로 나아간다. 자유의 율법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도가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영접하는
것은 그 분의 판단을 받기 위함이다. 긍휼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이 긍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로부터 긍휼없는
판단을 받게 된다.(기쁨이 없게 된다)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긍휼로 죽었던 영이 살아났는데, 형제의 영을 살리는 일에 무관심하다면, 그리스도의 긍휼없는 판단이 되는 것이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판단을
받고 행하면 긍휼(기쁨)이 되고, 자랑하게 된다.
6. 말에 실수가 없는 삶
야고보서 3장 1-3절『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
듣기를 잘 하고, 말하기를
천천히 하라는 것이다. 즉 성경의 의미를 정확히 듣고 난 후에 말을 하라는 것이다. 성도가 성경에 대해서 말을 하는 순간 선생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선생은 교역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교역자는 다른 말을 전하면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이 되려고 하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것이다. 선생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의 권세를 주었는데, 잘못된 것을 가르치면, 심판받는 것이 크다는 것이다.
말의 실수가 없는 자는 자기 몸의
굴레를 씌우는 자다. 성도(사역자)의 심령에 있는 호 로고스는 말로서 성도(사역자)를 다스린다. 사역자가 주님의 말씀에 통제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성도
안에 있는 호 로고스의 말은 그 사람을 통제한다. 그래서 야고보는 몇가지를 비유로 든다. 첫째, 비유로 말(horse)을
등장시킨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말의 주인에게 순종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두번째 비유로 배의 키가 배를 통제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몸을 통제하는 호로고스의 역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혀를 등장시킨다. 혀는 몸의 아주 작은 지체이지만, 능력은 크다는 것이다. 여기에 작은 불을 등장시킨다. 작은 불로 시작해서 엄청난 화재를 일으키는 것으로 비유했다. 혀와
불을 등장시킨 것은 부정적인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호로고스가 아닌 자기 생각을 주입하여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혀는 불과 같은 역할을 하는데, 부정적인 결과(불의의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불의 세계는 화재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불의의 세계는 온 몸과 마음을 망치게 된다. 그래서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고 표현했다. 잘못된 말이 인생을 고통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영적으로 게엔네스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게엔네스를 지옥불로 번역했지만,
지옥이 아니라 음부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음부에서 둘째 사망에 처해질 것이다.
객관적으로 표현된 말이지만, 혀는 호 로고스가 없는 혀를 의미한다. 교역자가 자기 생각대로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악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독이 되는 것이다.
영의 생명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없는 교역자들도 모든 교회의 의식을 한다. 기도하고 찬송한다. 그런데, 그들은 영적 부활을 믿는 사람을 저주한다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볼 때, 그 교역자가 잘못된 길로 가므로, 정확하게
지적해 주면, 오히려 그들을 비난하고 저주한다는 것이다.
7. 세상과 결별하는 삶
야고보서 4장1-3절『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헤도논)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
헤도논은 욕심으로부터 나오는 쾌락을 의미한다. 욕심이 생기면 그것을 달성하려고 하는 마음이 쾌락적인 것이다. 결국
교회 지도자들이 욕심으로부터 다툼이 생기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온갖 방법을 다해서 욕심으로 이루려하지만, 결국 얻지 못하는 것이다. 교역자들이 선생이 되어 얻으려고 하는 것은 이런 욕심으로는 이룰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 간구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데, 그것은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즉 교역자들은 세상의 것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하늘의
것을 구해서 얻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구해도 헤도나이스(욕심으로 인한 쾌락)를 위해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늘의 것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음하는 여인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과 벗된 자를 의미한다. 왜 간음한
자를 여인으로 표현했는가? 여자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선악과를 먹은 하와를 상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자를 상징한다. 세상의 벗은 세상을 사랑하는
부자를 상징한다. 이 세상에 돈을 많이 가진 자도 부자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부자는 탐욕(옛사람, 우상)을 가진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하는 것은
탐욕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탐욕은 물질인 육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부자가 천국을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나 한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방법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탐욕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를 심령 속에 거하는
성령이 하나님을 부러워하는 정도로 사랑한다는 표현이다. 그런데, 4장 4절에서 교역자들이 영적으로 간음을 하므로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크시겠는가?
탐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8. 남을 비방하지 않는 삶
야고보서 4장 11-12절『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
마태복음 7장 1-2절에『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예수님이 산상설교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특히『형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형제는 믿음의 형제를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서로 비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비판은 육의 눈으로
바라보고, 자기의 잣대로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특히 교역자)가 형제를 비판하면, 결국 형제를 율법의 잣대로 판단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을 하면서 비판하므로 율법에 대해서 살아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재판관인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율법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이웃을 판단하는 인간의 모습은 선악과를 먹은 자의 모습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에서 선은 하나님이시고, 악은 선악과를 막은
자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율법을 의미하는데, 율법을
통해서 인간들은 죄악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그리스도의 복음)도 함께 있음을 알려주신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탐욕을 마음에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악과를 먹으므로서 하나님 처럼 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 재판관이
되고 싶은 것이다. 율법을 지키므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자들인 것이다.
9. 허탄한 생각을 가지지
않는 삶
야고보서 4장 13-17절『들으라(아게 뉜 호이 레곤테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칼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아게 뉜 호이 레곤테스(Ἄγε νῦν οἱ λέγοντες)는 지금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들은 교회 안의 부자들이다. 이 부자들은 교회 안에서
탐욕으로 물든 부자들(특히 교역자)이다. 부자들은 이익을 내기 위한 장사 생각만 가득하다. 부자가 돈이 많아도
주님이 그날 밤에 데려가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돈을 열심히 벌어라 라고 말씀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가정법으로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면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뜻도 모르면서 허탄한 일만 하고 있는 것이다. 부자들의 특징이 허탄한 자랑을
하는 것이다. 어떤 교역자들이 교회를 이용해서 어떻게 성공했다느니 하는, 허탄한 말을 쏟아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칼론은 가치있는 일이다. 가치있는 일은 죽어있는 영을 살리는 일이다. 그래서 영을 살려 주님께
나아가게 하는 일이다. 그것에 관심없는 교역자들은 죄를 짓는 자라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께 나가지 않는 것이 죄다.
10. 부에 대한 경고
야고보서 5장 1-3절『들으라(아게)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탈라이포리아이스)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아게는 돌아오라 라는 의미다.
탈라이포리아이스(ταλαιπωρίαις)는 비참함이다. 둘째 사망에 들어가 심판을 받는
비참함이다. 부한 자들은 탐욕에 찌든 교역자를 의미한다. 살(몸)이라고 번역된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았다는 의미다.
무엇이 그렇게 했는가 하면, 탐욕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탐욕스럽게 부자가 되는 사람은
일꾼에게 정당한 삯을 주지 않고 착취하여 부를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도 하나님 말씀으로 신도들을 양육하지도 않으면서, 각종 명목으로 돈을 헌금하게 하여
자신들의 이익에 치부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율법주의 바리새인들이 십자가에서 죽였듯이, 교회 안에서도 인본주의, 율법주의, 영지주의에 물든 교회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의미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을 대항하지 않고, 오래 참으사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나타난 엄청난 갈등(율법주의, 영지주의 등)으로
인해서 성도들이 고통을 받는다. 서로 이 교리가 옳다 저 교리가 옳다는 식으로 다툼이 발생한다. 그래서 인내하고 참으라는 것이다. 그들이 잘못된 것들(율법주의, 영지주의)을
깨닫고, 바른 신앙의 길로 갈 수 있다도록 참고 인내하라는 것이다.
어느 가정에서 자녀들이 싸울 때 부모가
판단해주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성도간에 다툼이 있을 때, 심령
속의 그리스도께서 판단해주시는 것이다.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분은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즉 선지자들을 핍박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서 선지자들을 핍박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이스라엘 안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그러면 그렇다고 말하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Yes(예), 하겠습니다』로 받아드리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No,(우리 말:예),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적 관습의 차이에서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
11. 맹세하지 말라
야고보서 5장 12절『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은 맹세가 필요없다.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고 하는 자들이 맹세를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 33-37절에서도 맹세에 대해서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맹세에 대해서 『지키라』는 것이 구약성경의 가르침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백성들이 자원하여 맹세하는 것은 금하지 않았으며, 만약 맹세했다면 반드시 지키라고 명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했으며, 심지어 악에서 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맹세 자체를 무조건 금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위선적 형식적인 맹세를
단호히 거부한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에게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율법의 규정을 자기들 편리한
대로 악용하는 잘못된 습관을 당장 그만 두라는 뜻이었다.
예수님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맹세를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을 예리하게 지적하셨다. 그들은 금과 예물(성전에
바칠 헌물)을 걸고 맹세한 것은 꼭 지키되, 성전과 제단에다
대고 말로서 한 맹세는 꼭 지킬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금보다 성전이, 예물보다 제단이, 성전과 제단보다 하나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모든 맹세는, 돈을 걸었든 말로만 서약했든, 결국 하나님께 행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맹세라도 최선을
다해 지켜야지 맹세 중에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Ⅱ. 인내와 기도
1. 인내
야고보서 5장 11절『보라
인내하는(휘포모네)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휘포모넨은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
머무는 것이다. 5장 10절의 오래 참음(마크로디메사태)과 5장 11절의 인내(휘포모네)는
의미상으로 전혀 다른 이야기다. 야고보는 신앙의 가장 핵심을 휘포모네인 것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 머무는 것에
대해서, 욥의 비유를 들었다. 욥은 엄청난 시련을 겪는다. 그러나 그 시련을 잘 견디고 인내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와중에서
성도가 휘포모네를 하고 있음을 하나님이 칭찬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다. 물론 욥은 처음부터 휘포모네를 잘한 자는 아니다. 욥도 고난 속에서
아내로부터 비난을 듣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친구들과
대화 과정을 통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휘포모네 과정을 성경은 보여준다.
야고보는 유대인 신자들을 상대로 너희가
욥의 휘포모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휘포모네하는 자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주시는데, 교회 안에서 교리적인 문제로 다투지 말고 먼저 휘포모네를 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정리해 주실
것이다 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2. 기도
야고보서 5장 13절『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프로슉사스도산)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헬라어에서 기도는 두가지로 표현된다. 프로슈케와 유케다. 프로슈케(προσευχέσθω)는 프로스(영어:toward
~향하여)와 유케의 합성어다. 프로스는 하나님의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스유케는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을
기도하는 것이다. 유케는 어떤 사람이 자기가 믿는 신에게 소원을 비는 것이다.
성도가 영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은 기도하는 내용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듣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전도를 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께
어떻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고난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프로슈케 기도는 하나님 보좌에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이다. 병이 왜 들었는지, 병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다. 장로들은 휘포모네(하나님 보좌에 나가는 것)가 되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는 또한 프로슈케(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의 기도를 해야 한다.
프로슈케로 기도하지 못하는 초신자들은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육적으로 연약하여 항상 죄에 노출되어 있음을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죄로 오염된 육체가 병이 들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의를 구한 것 같이 육체의 병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도하는
순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고, 처음 믿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죄 사하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병든 자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죄를 사해주심과 같이 병도 고쳐달라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기도다. 유케의 기도는 프로슈케의 기도와는 다른 차원이지만, 서로
모여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엘리야가 기도하는 것은 프로슈케(보좌에 나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기도였다.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는 자가 의인의
기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했다.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다가 고치지 못하자, 그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는데, 예수님이 직접 고쳐달라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패역한 자들이여
라고 말하고, 아이의 병을 고쳐주셨다. 이후 제자들은 왜
우리는 고칠 수 없는가라고 예수님께 물렀더니 예수님은 오직 답은 기도(프로슈케)뿐이라고 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유케의 기도만 할 뿐이었다.
북이스라엘 아합왕때 산지자가 엘리야였다. 아합은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여, 바알을 섬기고 하나님께 죄악을 저질렀다. 그래서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하여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게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엘리야는 아합왕을 찾아가 바알 선지자 400명, 아세라 선지자 450명을 갈멜산으로 오도록 하여 누가 참신이지 알게
하자고 했다. 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알과 이세라 신에게 온갖 소리를 내어 외쳤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엘리야가 기도를 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우상의 제단을
다 태워버렸다. 가짜 선지자들을 다 죽게 했다. 그리고 엘리야는
백성들을 위하여 다시 하나님께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한 후 비가 다시 내린 내용이다. 엘리야가 하는 기도(프로슈케)는 그 땅에서 우상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성전을 회복하는 기도였던 것이다.
제3부. 유다
Ⅰ. 거짓교사들에 대한 심판
1. 율법주의자들
유다서 1장 17-19절『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성경에서 사도들이 말한 것을 잘 기억하라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스카투 투 크로누 ἐσχάτου χρόνου)에 대해서, 성경에서 때는 카이로스의 때(하나님의 시간)와 크로누스의 때(물리적인 시간)가
있다. 따라서 마지막 때는 세상 종말론적인 때가 아니라, 개인적
신앙의 마지막 때를 의미한다. 신앙생활은 오래 했는데, 처음
보다 훨씬 더 나빠졌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대로 믿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신앙적으로 남을 함부러 판단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육에 속한 자라고 했는데, 원어에는 혼으로 되어있다. 즉 옛사람으로 오염된 혼적인 자인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과 율법이 함께 가야만 구원이 된다는 거짓된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초대교회에서 상당히 악영향을 미친 것이다.
2. 범죄한 천사 이야기
유다서 1장
6절『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아르켄은 아르콘(통치자)의 동사형으로 통치를 받는 것이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았다는 말은
통치에서 벗어났다는 말이다. 거짓을 말하는 자들(영지주의
자들)에 대한 심판이 마치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영지주의 자들은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자들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았던 천사들도 사탄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의라는 것이다. 자기의 의는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우상을
세워 신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영지주의자들을 악한 천사들과 같이 심판하시겠다고 했다.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에서 자기 처소는 하나님의 집이다. 영이 들어간 집을 장막이라고 표현한다. 영이 들어간 하나님 나라의
처소를 이 땅에서는 장막이라는 표현을 했다. 고린도후서 5장 1-2절에서『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
유다서 1장
7절『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사르코스는 부모로부터 받은 몸(소마:껍질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들어간 육신을 의미한다. 다른
육신을 따라 가는 것은 육체 속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자기가 우상)를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지주의는 인간 속에는 신성이
있는데,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찾으려고 하는 종교를 대표하는
것이다.
영지주의자에 대한 심판은 세번째로 거론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우상숭배와 동성애가 심한 곳이었다. 이것은 영적 간음을 의미한다. 물론 동성애는 육적으로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동성애는 모든 죄들과는 다르다.
고린도전서 6장 9절에서『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밑줄진
부분의 영어(kjv)에서『Know ye not that the unrighteous shall 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 Be not deceived: neither fornicators, nor idolaters, nor
adulterers, nor effeminate, nor abusers of themselves with mankind 』 음행하는 자는 포르노를 즐기는 자, 탐색하는 자는 여성화된
남자(헬라어: 모이코스μοιχός : 정을 통한자,변절자), 트랜스젠더를 말한다. 남색하는
자가 동성애자다.
Ⅱ. 교회 안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
1.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들
초대 교회 당시에 부활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부활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 부활을 육체가 살아는 것인가 아니면, 영적으로 살아나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다. 그래서 결국 육체로 살아나는가
아니면 영적으로 살아나는 가에 대한 논쟁으로 귀결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예수의 시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었다고
믿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체는 안식일에 하나님이 가져가신 것이다. 하나님이 시체를 없애버렸다. 요한복음 3장 13절『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잘못된 번역을 헬라어 성경을 통해, 다시 하면, 『하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아무도 하늘로 들어갈 자가 없다』인자외에 아무도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인자는 첫사람 아담으로 가장 먼저 하늘을 나온 자이다. 에베소서
1장 15절에서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두번째 부활로 에녹이 하늘에 올라갔다. 에녹의 죽음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에녹은 첫사람아담 이후 여덟번째 자손으로, 새창조 부활 상징한다. 히브리서 11장 5 절에서『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에녹은 몸이 부활했으며(변했으며) 아무도
죽음을 보지 않았으므로,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가 변형 전에 하나님이 옮겨셨기 때문이다.
모세의 죽음도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는 120세에 죽었다. 율법의 대표자로 죽었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 그림자이다. 결국 두분 다 죽었지만 아무도
시체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사람 아담이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으며, 그리스도는 부활하였고, 부활전에 이미 시체는 사라졌다.
금요일에 예수의 시체를 장사하고 무덤에 넣었는데, 하나님이 토요일(안식일에)에 시체를 치워버리고, 그리스도는
영의 몸으로 일요일에 부활하셨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않으려 했다. 민수기
19장 11-22절에서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된다. 안식은
히브리어로 네파쉬라고 하는데, 네페쉬와 어근이 같다. 네페쉬는
살아있는 생명체를 의미하고, 네파쉬는 호흡, 생기, 생명를 의미한다. 따라서
시체와 안식은 의미가 다른 것이다. 안식은 시체를 치워버리고 생명으로 대체해야 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셨다. 마태복음12장 9-13절에서 안식일에 손마른 자를 고쳐주시고, 누가복음 13-1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몸이 꼬부라진 여자를
고쳐주셨으며, 수종병이 든 사람을 고쳐주셨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귀신들리고 병든 자를 고쳐 주셨다.
이는 안식일에 죽음을 제거하는 모습이다. 죄를 제거하는 모습이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까먹었다. 이삭을 까야 속이 드러난다
부활의 열매를 먹는 것을 상징한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안식일을
범하는 자를 돌로 쳐 죽였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안식일 규정에서 유래한다(출 31:14-15; 35:2). 하나님은 안식일을 범한 자를 죽이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죽이라는 말을 두 번 거듭 말씀하신다. 출애굽기 31장 15절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죽고 죽으리라)』죽고 죽으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물세례와 불세례를 상징한다.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불순종이며 십자가의 죽음이다. 안식일에 시체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범하는 것으로, 없애야 하는 것이다. (죽고
또 죽고)시체가 되는 것은 죄에 대해서 죽는 것(물세례)이며, 시체를 없애는 것은 옷을 제거하는 것(불세례)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도 옛사람의 시체를 없애버려야 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일곱족속을 죽이듯, 성도 역시 심령 속의 육적 자아를 죽여야.
한다. 육적자아는 일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안식일은 일곱째 날로 창조를 완성하는 날로서, 이 날은 생명을
의미한다. 안식일 무덤 안이 생명으로 바뀌려면 시체(옛사람)를 치워야 하는데, 옛사람을 치우면 새사람이 등장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 22-24절『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성도가 옛사람의 옷을 벗고(사라지고) 새사람을 입는다. (등장)
세상은 무덤이지만 그리스도로 인해 천국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옛성전이 무너져야 한다. 창세기2장 1절에서, 일곱째 날 하늘의 군대와
땅의 군대가 편성되었다. 한글 개역개정은 잘못 번역된 것이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에서 만물은 군대(챠바)를 의미한다. 그래서 일곱째 날에 하늘의 군대(천사)와 땅의 군대(사람:악한
천사의 영)가 통일 되는 것이 안식이 되는 것이다. 무덤은
땅을 의미하며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려면 땅을 상징하는 무덤이 열려야 한다. 마태복음 27장 52절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안식일 다음 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마태복음 27장 53절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사람들은 아무도 예수의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된 몸을 찾았다. 왜 사람들은 시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화했다고 믿는가? 그들은 죽어야 할 육체가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육체는 죄의 몸인데,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죄의 몸이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활은
시체와 상관없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대부분 교회
사람들이 육체의 부활을 가르치고 믿는다. 거짓선지자들이 얼마나 큰 죄인가 라고 말을 하면, 유다가 지적하듯이 노아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에서 불심판과 같은 죄라는 말이다.
2. 진리의 말씀을 통해 율법주의로부터
나오게 함
유다서 1장 23절『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하르파존테스)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하르파존테스는 붙잡아라는 의미다. 둘째 사망으로 끌려들어가지 않도록 붙잡아라는 것이다. 테스 사르코스는
몸(부모로부터 받은 몸)이 아니라 영이 들어있는 육신을 의미한다. 영적 원죄로부터 더럽혀진 옛사람의 옷을 벗어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새사람인 부활의 옷을 입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이들을 미혹한다. 율법주의에서 나오는 것이 구원의
길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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